김용 세계은행 총재 선출 막전막후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올 7월 공식업무를 시작한다. 세계은행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우리가 김용 총재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첫 동양계 세계은행 총재라는 수식어는 선출 과정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포춘코리아가 김용 총재의 선출 과정과 그의 미래를 입체적으로 살펴봤다.

김용 다트머스 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최종 선출됐다. 유례 없이 펼쳐졌던 외신들의 세계은행 총재 후보자들에 대한 품평도 잠잠해졌다. 김용 총재는 월스트리트저널과 이코노미스트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세계은행 사무총장(현 나이지리아 재무장관)과 남미국가들이 추켜세운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거센 추격을 끝내 뿌리쳤다.

하지만 첫 동양계 세계은행 총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부감은 생각보다 높았다. IMF 총재는 유럽의 몫,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의 자리라는 국제사회의 공식조차 흔들 정도로 거센 반발이 나왔다. 평생 남을 위해 살아온 김 총재에게 큰 상처로 남을 만한 것들이었다.

앞으로도 김용 총재가 넘어야 할 산은 많아 보인다. 먼저 첫 소수계 세계은행 총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을 실적으로 깨 부숴야 한다. 세계은행 내부에 팽배해 있는 관료주의도 극복의 대상이다. 미국 시민이기에 앞서 한국계로서 향후 국제사회에서 맡게 될 역할도 고민해야 한다.

김용 총재와 30년 가까이 우정을 쌓아온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말에 따르면 김 총재는 하버드대에서 두 개의 박사학위를 동시에 밟는 와중에서도 그녀가 진행하는 한국어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김 총재가 한국인의 정체성,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삶, 더 나아가 인류의 존재 의미까지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용 총재의 53년 삶에는 이 같은 고민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포춘코리아가 그의 인생 역정을 세계은행 총재 선거전부터 시계를 거꾸로 돌려 되짚어 봤다.

 



치열한 선거전? 비열한 비난전!

"김용 박사의 총재 선임은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입니다. 김 총재가 앞으로 세계은행에서 할 일이 매우 기대됩니다." 한국인으론 세계은행 최고위직에 있는 김훈애 중동ㆍ북아프리카 환경ㆍ농업 섹터 매니저(국장급)는 이 같이 말하며 김 총재의 선임에 큰 환영을 나타냈다. 세계은행―IMF 한국인 직원연합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세계은행의 목표는 지구상에서 가난을 없애는 것(Our vision is the world free of poverty)"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모델을 개발도상국에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국의 지분율에 따라 세계은행의 직원 수가 정해지는데, 한국은 직원 수가 너무 적다"며 한국 정부가 원조 액수에 비해 세계은행에서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세계은행의 한 간부급 직원은 이번 총재 선거가 유례 없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 또한 김용 총재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간부는 "공식적인 투표와는 별개로 세계은행 직원들이 자체 사이트 (http://community.worldbank.org/polls/1230)를 통해 진행한 차기 총재 모의 선거에서 김용 총재의 득표율은 10%대에 불과했고, 세계은행 출신인 오콘조-이웨알라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은 한때 70%를 기록했었다"며 분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이코노미스트 등 서구 유력 언론들이 선출 직전까지 김 총재를 사실상 보이코트한 이유도 하나같이 자질론이었다. 금융계에서 일하지 않은 비전문가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세계은행 모잠비크 지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영철 박사는 이에 대해 "이코노미스트 3월 31일자 기사를 보면서, 언론이 특정 세계은행 총재 후보를 공개적으로 두둔한다는 것 차체가 (지금까지의 선례에 따르면)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세계은행의 한 직원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짐 용 킴(김용의 영어 이름)은 미국 국적이지만 선거 과정에서 미국 정부나 언론의 지원사격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한국 정부는 완전히 남의 일처럼 처신했고요. 중국계나 일본계 혹은 남미계 미국 국민이었다면 얘기가 달랐을 거예요." 그는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유일하게 김용 총재에게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은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였다. 그는 처음엔 세계은행을 개혁하겠다며 출마의지를 내비쳤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김용 총장을 총재 후보로 지명하자 김 총재 지지로 선회했다. 선거 직전까지 김용 총재에게 우호적이던 주요 외신도 제프리 삭스 교수가 칼럼니스트로 있는 뉴욕타임스가 거의 유일했다.

김용 불가론을 외친 주요 외신과 월스트리트 인사들, 그리고 주류 미국인들은 금융계 경력이 없다는 이유와 함께 2000년 저서 '성장을 위한 죽음(Dying for Growth'까지 파헤치며 그의 경제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이 책에서 김 총재가 기업과 자유시장주의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일형 IMF 중국사무소 수석대표는 "세계은행의 역할은 후진국 개발을 도우며 빈곤을 퇴치 하는 일"이라며 "세계은행이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긴 하지만 세계 금융계와는 크게 관계가 없기 때문에 김용 총재에 대해 '세계 금융계가 반발 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 맞지 않는 표현 같다"고 선을 그었다.

논란을 예상해서인지 김용 총재는 선임 직전까지 직접적인 의견 표명을 최대한 자제했다. 김용 총재를 보좌해왔던 다트머스 대학의 한 교직원은 포춘코리아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미국 국무부가 (소수계라는) 논란을 우려해 김용 총재의 언론 인터뷰를 차단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질론과 과거 파헤치기가 계속 문제가 되면서 김 총재는 4월 10일 뉴욕타임스와 전격 인터뷰를 가졌다. 김 총재는 이 인터뷰에서 "나는 정부와 부족한 사회 기반 시설이 복잡하게 얽힌 보건 문제를 다뤄왔기 때문에 세계은행을 이끄는 데 필요한 충분하고 광범위한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성장 반대주의자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세계은행은 (책을 썼던 시점 이후) 많이 변했고, 이젠 빈곤을 줄이는 성장정책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고 답변했다.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언론을 상대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한 셈이었다.

김 총재가 역대 총재 후보와는 달리 이례적으로 큰 반발을 사게 된 원인은 첫 소수계 출신 총재에 대한 견제심리였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은행 총재를 사실상 지명하는 것에 대해 개발도상국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 세계은행 직원들의 내부 모의 투표 결과(경쟁후보가 한때 70% 지지 획득)에서 알 수 있듯이, 실천가이자 혁신주의자인 김 총재에 대한 내부 직원들의 반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세계은행 관료주의 극복이 첫 과제

세계은행은 도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내부 직원들이 봉사에 평생을 바친 혁신가 총재 후보에게 반감을 갖는 것일까? 오바마 행정부와 북미권 지식인들은 몇 해 전부터 세계은행에 '조직 혁신과 개혁'을 요구해 왔다. 익명을 요구한 세계은행의 한 간부급 직원은 말한다. "5개 기관이 합쳐져 만들어진 게 세계은행그룹입니다. 세계를 6개 지역으로 나눠 관리하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나 리서치센터인 브루킹스도 거느리고 있어 조직이 무척 복잡하고 정치적이죠. 남미 등 일부 국가 출신 직원들은 세계은행이 지분에 따라 운영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각 나라마다 한 표씩 행사하는 UN 같은 조직으로 착각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간부는 "1944년 유럽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은행이 지금은 세계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조직으로 변했지만 운영체제는 별로 바뀐 게 없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덧붙였다. "3~4년 전부터 과거 운영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총재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당시 오콘조-이웨알라 세계은행 사무총장이 '세계은행 현대화' 프로젝트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져 지금도 직원들의 불만이 굉장히 많은 상황입니다."

실제 세계은행의 현대화 작업에는 돈이 아닌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게 내부 직원들의 시각이다. 이 간부는 "이제 융통성과 스피드가 필요하다"며 "실수를 해야 배움과 혁신이 나올텐데 세계은행의 관료주의(Bureaucracy) 때문에 진척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용 총재가 세계은행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관료주의부터 없애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금융계의 한 고위인사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세계은행에서 뿌리내린 사람이 오콘조-이웨알라 같은 사람이지만, 사무총장 시절 세계은행을 개혁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 며 "이제 세계은행은 새로운 총재가 얼마나 새로운 분야의 아이디어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느냐에 따라 명운이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세계은행의 중간 간부는 "김용 총재의 가장 큰 장점은 정치적으로 보답해야 할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라며 "실천가로서 조직에 비전을 제시하면서 총재를 보위할 20여 명의 고위급 인사를 혁신적으로 단행한다면 조직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트머스 총장 맡자 백인들 기부금 감소

하버드대 교수였던 김용 총재는 2009년 아이비리그 대학 최초로 다트머스 대 동양계 총장이 되면서 워싱턴 정가의 주목을 받았다. 2011년 가을 다트머스 대 MBA 오리엔테이션에서 김용 총장은 "자부심 강한 차세대 비즈니스 리더로서 특히 사회적 책임에 역점을 두는 인물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한국인 학생은 말한다. "연설이 끝나자 (외국인) 동기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치면서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어요. 같은 한국인의 뿌리를 가져서 자랑스럽겠다는 뜻이었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흑인 동기들이 '짐 용 킴은 아프리카의 친구'라며 내게 아는 척을 해와 뿌듯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차세대 리더로 꼽히던 김용 총재는 스스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또 이를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트머스 캠퍼스에서 한국 학생들을 만나면 항상 "안녕하세요" 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는 다트머스 학부 학생회가 한국페스티벌을 열고 사물놀이패 공연을 성대하게 개최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MBA 과정에서 미디어 관련 컨퍼런스를 열었을 땐 30년 지기인 이미경 CJ 부회장에게 한국영화에 대한 강의를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미국 굴지의 언론사들이 대거 참여한 이 컨퍼런스에는 외국 미디어론 유일하게 CJ만이 참석했다.

하지만 아이비리그 최초이자 유일한 동양계 총장이었던 김용 박사는 서러움도 많이 당했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재정의 상당 부분을 기부금에 의존한다. 특히 백인 상류층이 내놓는 기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트머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용 총재가 총장으로 부임한 첫해 1억3,700만 달러였던 기부금은 이듬해인 2010년 미국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1억5,200만 달러로 반짝 올라갔지만 2011년에는 1억4,600만 달러로 다시 떨어졌다. 이 해 다트머스 대학은 미국 전체 대학 기부금 모금 순위에서 42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미국 대학들의 평균 기부금 모집액수가 8.2% 늘어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김용 총재는 2011년 교수들의 집단 반발 사태를 겪기도 했다. 교수들이 예산 비공개를 결정한 대학 측에 반발해 집단 결의안을 냈기 때문이다. 그 때 김 총재는 교수들의 요구에는 응했지만, 1만 달러 이상의 예산 집행 내역을 공개하라는 학생들의 요구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김 총재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였다.

다트머스대 총장에 임명될 때에도 그는 반대파에 시달렸지만 결국 그 자리에 올랐다. 당시에도 그에게 조직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다는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그는 의료행정가로서 직원 1만 명이 넘는 큰 조직을 만들어 20년 넘도록 회장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바로 가난한 나라 환자들을 돕는 '파트너스 인 헬스(PIH:Partners In Health)'가 그것이었다.

 



직원 1만 명 관리한 의료행정의 혁신가

김용 총재는 1987년 하버드 대 교수 재직 시절 PHI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의사이자 인류학 박사였던 그가 질병으로 고통 받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세운 단체였다. 중남미 빈국인 아이티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지금도 의료계에서 가장 성공한 의료 봉사 모델로 꼽히고 있다. 김 총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라면 2,000만원 가까이 치료비를 내야 하는 아이티 환자에게 15만원 가량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PHI 활동에 관여했던 한 다국적제약사의 직원은 말한다. "김 총재는 결핵 약 등 필수약품을 고를 때 효과는 같지만 값은 훨씬 싼 복제약을 채택했습니다. 오래 전에 개발됐던 약은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약회사들과 협상을 벌였죠. 김 총재의 이런 노력에 감동 받아 우리 회사는 일부 펀드를 조성해 PHI를 돕기도 했어요."

PHI는 1994년부터 페루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4년 후에는 세계보건기구(WHO)가 PHI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지역 기반 의료복지활동의 모범사례로 삼았다. PHI는 재난지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빠르고 저렴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단체는 현재 12개 국가에 1만3,00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WHO는 김용 총재가 만든 이 시스템을 활용해 30여 개 국에서 PHI식 지원을 펼치고 있다. 김 총재는 2003년까지 이 단체 회장직을 수행했다.

김 총재는 2004년 WHO 에이즈 국장으로 임명됐다. 의료행정가로서 보여준 혁신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WHO에서도 그의 혁신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중심이 됐다. 그는 부임 첫해 '3 바이 5 이니셔티브(3X5 Initiative)'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1년 안에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에이즈환자 300만 명을 치료하겠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2005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결국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김 총재의 실행력만큼은 빛을 발했다.

목표에 미달한 프로젝트는 대부분 흐지부지 끝나기 십상이지만 김 총재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6년 WHO 조직을 떠나 하버드대로 복귀한 후에도 자신의 계획을 꾸준히 측면 지원했다. 그 결과 2007년에 마침내 300만 명의 개도국 에이즈 환자가 적합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국제사회가 아프리카 에이즈 치료를 당위로 받아들인 계기가 된 김용의 이니셔티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현재 700만 명 이상의 환자가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의 친구'라는 그의 닉네임은 그런 연유로 생겨난 것이었다.

김용 총재는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의료행정가로 보냈다. 1993년부터 다트머스 대 총장이 된 2009년까지, WHO와 PHI 활동 등으로 바빴던 2003~2006년 4년을 제외하곤 줄곧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현장을 뛰었다.

김 총재는 의료복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의료행정을 한 단계 성장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PHI 프로그램처럼 의료행정과 지원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개인적 봉사 차원이었던 가난한 나라에 대한 의료 지원을 체계화 했다. 이런 김 총재의 활동에는 국내에서도 유명한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마이클 포터 교수의 공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두 교수는 하버드 의과대학 글로벌 헬스 딜리버리 프로젝트(Global Health Delivery Project)를 공동으로 추진해 효율적인 전세계 의료 지원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총재는 같은 목적으로 전 세계 개업 의사들이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의학지식과 문제 해결책을 제공하는 웹사이트 'GHD온라인'도 만들었다.

김 총재가 의료행정가로 또 실천가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원칙은 보편적이고 체계화된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원칙에 입각해 한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PHI나 GHD, 아프리카 에이즈 치료 지원 등 김 총재가 만든 의료 관련 프로젝트가 모두 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용 총재가 주춧돌을 놓은 프로젝트는 그가 떠난 이후에도 변함없이 성장을 거듭했다. 김 총재가 일이 저절로 굴러갈 수 있도록 확실히 기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 대 재학 시절, 이미경 CJ 부회장에 고민 털어놓기도

김용 총재는 원칙주의자다. 목적 달성을 위해 잠시 돌아가거나 현실과 타협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미경 CJ 부회장도 김 총재가 우리가 사는 세상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파악과 근본부터 해결해 가는 접근법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이민 1.5세대인 김 총재는 청년 시절 이미경 부회장과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고, 동양계 미국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김 총재는 교수 시절 하버드대 교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버드 의대 시절은 인생의 목표를 확립하는 과도기였어요. 그 때 내린 결론이 사회 정의를 위해서 헌신하자는 것이었죠.···한국에서 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지만, 한국보다 더 도움이 절실한 나라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은 지금과 모든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가 한 때 '한국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할 때만 해도 한국은 그런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아이티와 페루, 아프리카를 선택했다. 더 많은 도움이 더 빨리 필요한 곳,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에이즈 치료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경 부회장이 설명한 '근본부터 해결해 가는 접근법'과 맥이 닿아 있었다.

 



고교 시절 운동도 공부도 수석

김용 총재에게 한국은 먼 나라가 아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HO에서 근무할 때 불편했던 점으로 "한국 식품점이 없어 김치를 담가먹어야 했던 일"을 꼽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대해 이처럼 친숙한 데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김용 총재는 매우 탁월한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다. 어머니 전옥순 씨는 경기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이오와 대학에서 퇴계 이황을 연구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석학이었다. 김 총재는 특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브라운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선친 김낙희 씨에게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반항을 하기도 했다. 김낙희 씨는 "소수계로서 전문직을 가지는 것이 좋으니 전문의 과정을 먼저 밟고 나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김 총재의 부친인 김낙희 씨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내려와 1951년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통역장교로 제대를 한 후 미국 구겐하임 치과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그는 귀국 후 현재의 치주학회인 대한치과페리오학회를 창설하고 1, 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미국 병원 근무 경험을 살려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낙희 씨는 아이오와대학에서 치의학을 공부했으며, 한국에 다시 돌아와 4~5년 동안 개원의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 이민을 간 김용 총재는 아이오와의 소도시 무스카틴에서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김 총재?무엇을 해도 튀는 아이였다. 공부와 운동은 물론, 사회 의식도 일찍부터 깨어있었다. 불과 13세였던 1972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와 조지 맥거번 민주당 후보가 맞붙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선거 캠프의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했다.

김 총재는 고등학교 때 교내 미식축구부에서 쿼터백을 맡아 화제가 됐다. 그 때부터 '동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따라 붙었다. 쿼터백은 선수들에게 공을 배급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맡는 위치다. 야구팀으로 치면 주장이자 4번 타자다. 1970년대 미국 소도시에서 자랐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많이 받았을 법한데, 그는 그 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8년 무스카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전교생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 서서 실천하는 그의 품성은 유년기부터 그의 뼛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한정연 기자, 홍성민 기자

 

 

[출처]: 한국일보 2012년 7월 3일

 

 

 

Posted by 경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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