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인도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노인들의 이야기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인도에 온 그린슬레이드 부인(주디 덴치)은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인생의 모든 것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것도 나눌 수 없다면 결혼이 무슨 소용이에요?”


   결혼 전 우리 부부의 거리는 자동차로 20분이었다. 부부가 된 지금, 우리는 신혼집 어느 공간에서도 서로의 동선과 행동을 파악할 수 있다. 신혼 석 달. 나는 부부의 이상적인 거리에 대해 고민한다. 결혼 전에는 모든 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부부야말로 진정한 부부라고 믿어왔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나니 부부 간에도 긴장과 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남편은 연애기간과 결혼을 모두 합쳐 2년을 만났다. 이제 고작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남편이 일상을 나누는 가족이라기보단 여전히 연애하는 남자로 느껴진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나자 흔히들 말하는 ‘연애하듯 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베란다에는 우리의 속옷이 뒤섞여 널려 있고 욕조에는 서로의 머리카락이 엉켜 있으며 방바닥에는 빨아야 할지 말지 애매한 양말들이 널브러져 있다. 당신의 코고는 소리와 나의 이 가는 소리를 참아주며 잠드는 나날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런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 너무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남녀 사이의 긴장이 사라져도 괜찮은 걸까? 그런가하면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결혼 후 딱 한 번 운 적이 있다. 남편의 잘못이라기보다 상황의 복잡함 때문이었고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겹쳐 마음이 울적해졌다. 많은 여자들이 기분이 안 좋으면 입을 다문다. 안 좋은 기분을 못마땅한 선물꾸러미처럼 안은 채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그 날의 나도 입을 꾹 다물고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남편은 내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열심히 분석하는 것 같았다. 한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내 외로움의 불씨를 댕겼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우리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커다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조용히 울었고 남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오랫동안 나를 달래주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정확히 무슨 이유로 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굳이 내 속의 구질구질한 감정들을 모두 꺼내 서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솔직함의 힘이 못미더웠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동시에 부부관계 속에서마저 존재하는 거리가 서운하고 외로웠다. 여자란 참 복잡하다. 결국 너무 가까워져도 걱정, 멀게 느껴져도 걱정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잠들기 전 늘 베드토킹(Bed talking)을 한다. 하루 있었던 일들과 감정을 털어놓는 시간이다. 어젯밤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당신은 나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고 생각해? 남편은 조금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부부도 결국은 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인데, 솔직함이 언젠가 독으로 작용할까봐 두렵다고.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상냥해지고 솔직해질 수 있다. 그러나 평생을 봐야 하는 사람에겐 도리어 거리를 의식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솔직해진다는 것은 의외로 상대에게 책임과 부담을 떠넘기는 행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끼는 이유는, 그 관계를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부부로 살아가면서 말을 덜해서 후회하기보다 더해서 후회한다. 이미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한쪽이 홀로 남겨졌을 땐, 분명 하지 못했던 말들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후회는 남는다. 어쩌면 부부의 진정한 의미는 남녀 관계를 최대한 좁힌 결과물 그 자체가 아닌, 가장 이상적인 거리를 만들어나가는 장기적인 과정과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부부와 적당히 속마음을 남겨두는 부부. 어떤 것이 더 나은 그림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살아가다보면 나 혼자 묻어두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공유하고 털어놓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배려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노력 또한, 비밀 못지않게 부부가 나눌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고 믿는다


[출처]: 경향신문 2013년 5월 17일 





Posted by 경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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