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3월 16일: 세계최초로 액체로켓 발사에 성공하다

■뉴욕타임스의 ‘49년 만의 사과문’

 

“추가 조사와 실험은 17세기 아이작 뉴턴의 발견을 확인했으며 이제는 로켓이 대기에서처럼 진공 속에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타임스는 실수를 유감으로 생각한다.”

 

인류 최초의 달나라 착륙선 아폴로우주선이 발사된 다음 날인 1969년 7월17일. 뉴욕 타임스는 이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이는 1920년 1월12일자 1면에 “로켓이 달에 도착할 것을 믿다(니)‘, ‘고효율 로켓에 대한 복합적 비난’ 의 제목으로 내 보낸 사설에 대한 뒤늦은 ‘정정’기사였다.

 

▲ 고다드가 인류최초로 로켓을 발사한 지점을 기려서 세운 표지 동판.

하지만 사과를 받을 사람은 2차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8월에 이미 지구를 떠나 별이 되어버린 후였다. 주인공은 ‘우주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허칭스 고다드박사였다.

 

그가 비난을 받은 것은 달을 비롯한 행성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일반에게 처음 펼쳐 보여 주었던 ‘극한고도에 이르는 법’이란 논문 때문이었다.

 

1919년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출간된 이 69쪽짜리 책자는 로켓비행을 통해 진공상태인 우주로 가기 위한 수학적 이론, 고체연료 로켓 실험, 그리고 그가 본 지구대기와 대기 밖에서의 탐험 가능성 등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뉴욕타임스는 '우주의 진공 상태에서는 로켓이 추진력을 얻을 물질, 즉 반작용을 할 물질인 공기가 없는 만큼 우주로켓의 추진력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타임스는 "....고다드교수가 실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도 모르며 반작용을 할 수 있는 진공보다도 더 좋은 뭔가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고다드가 매일매일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도 없는 것 같다”고 썼다. 

 

1969년 7월의 정정기사는 자존심 세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뉴욕타임스가 고인이 된 고다드에게 보낸  49년 만의 사과문이었다.

 

■웰즈의 소설 ‘우주전쟁’을 읽고 우주비행을 꿈꾸다

 

“어제의 몽상가가 오늘의 희망이 되고 내일의 현실이 된다는 것은 흔히 진실이 되어왔습니다.”

 

1904년 워체스터 사우스고등학교에서 행해진 고다드의 졸업생 대표연설은 그가 로켓연구자로서의 미래를 다짐한 상징적 연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16살 때 영국의 소설가 H.G.웰즈의 소설 ‘우주전쟁’을 읽고 우주에 관심을 갖게 된 그에게 또하나의 계기가 더해졌다.
이듬 해  그가 죽은 나무가지를 자르러 체리나무에 올라갔을 때 문득 평생 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올랐다.
  
그는 1899년 10월 19일 일기에 “화성까지 갈 수 있는 기기를 만들면 얼마나 놀라울 것인가? 그리고 내 발치에서 농장을 보면 얼마나 작게 보일까?”라고 당시의 기분을 적었다. 이후 일생 동안 10월19일은 그의 기념일이 되었다.

 

고다드는 ‘극한고도에 이르는 법’ 출간 이후 이를 실행에 옮겨 액체산소와 가솔린을 사용하는 실린더식 연소엔진을 갖춘 로켓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 1926년 3월16일 고다드가 인류최초의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의 모습.

드디어 1926년 3월16일 매사추세츠 오번(Auburn).

 

로버트 고다드는 북동부 뉴잉글랜드의 차가운 날씨에 대비해 두툼하게 옷을 껴입고 자신이 고안한 피라미드 모양의 철제 로켓 발사 프레임을 잡았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다음 순간 로켓의 소형 발화장치가 점화됐고 그는 나무 오두막에 몸을 숨겼다.

 

보기 좋게 날아 올라간 인류최초의 로켓이 착륙한 지점은 눈덮인 에피 아주머니네 농장의 양배추밭이었다.

 

그는 다음날 일기에 “액체추진체를 사용한 최초의 로켓추진체가 어제 에피(Effie) 아주머니의 농장에서 이뤄졌다"고 적었다.

 

 ‘넬(Nell)’이라고 명명된 로켓은 2.5초의 비행기간 동안 41피트(10.25m)날아 오른 후 양배추밭에 떨어졌다. 최대고도는 12m였다.

 

이날 실험은 액체추진체를 이용한 로켓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주비행의 첫발을 내딛은 인류최초의 실험이었다.

 

■‘지옥의 샘’에서 ‘에덴의 골짜기’로

 

고다드는 이미 1914년에 로켓역사상 이정표가 될 다단계 로켓, 그리고 가솔린과 액체질화산소연료를 쓰는 로켓 등 2건의 로켓 특허를 획득한다.

 

이후 그의 우주로켓 실험은 그 자체가 처음이었던 만큼 시험할 때마다 신문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세를 치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는 그의 고향 매사추세츠 워체스터 근방의 ‘지옥의 샘(Hell Pond)’에서 로켓 실험이 이뤄지는 10년간 계속됐다.

▲ 비행기 이후의 기술을 생각하던 비행영웅 찰스 린드버그는 고다드박사의 후원자가 된다.

1929년 고다드의 실험 하나가 행해진 다음 날 워체스터의 한 신문은 “달로켓이 238,799 1/2마일 벗어났다”는 조롱섞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달을 목표로 한 로켓이 실패해 공중에서 폭발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실 기자가 본 로켓 잔해는 낙하한 로켓이 지면에 부딪친 것이었다. 게다가 로켓은 예정된 고도에 도달했고 실험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매사추세츠 주는 로켓 발사 실험 금지조치를 내린다. 

 

정작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세상의 무지였다. 미국정부와 군부, 학계가 로켓의 대기, 우주,군사적 응용연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비전도, 지원도 없었다.

 

이 해에 ‘비행기 다음은 로켓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미국의 비행영웅 찰스린드버그가 그의 후원자로 나섰다. 덕분에 구겐하임가로부터 4년간 10만달러를 지원받게 된 고다드는 1930년부터는 UFO 출몰 소동으로 유명한 뉴멕시코 주 로스웰의 ‘에덴의 골짜기’로 실험장을 옮긴다.

 

그는 가이던스시스템을 이용해 로켓을 안정화시키고 1935년까지 시속 880킬로미터의 속도를 실현시키는 등 그가 저서에 썼던  '극한 고도(Extreme Altitude)에 점점 다가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독일은 1942년 V-2로 84km의 고도까지 로켓을 쏘아올리며 대기바깥층의 한계에 도달하는 성과를 내는 등 ‘로켓의 아버지’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왜 우리에게 묻는가? 고다드에게 물어보라!”

 

“아니, 이것은...?”
1944년 말 메릴랜드 안나스프링스 해군연구소. 전투 중 확보한 독일의 V2로켓 잔해를 넘겨받아 살펴보던 고다드박사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V-2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터였지만 그로선 어떻게 독일이 이런 수준의 기술을 갖췄으며, 왜 여기에 자신의 핵심기술이 반영돼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다드는 철저한 조사 결과 독일이 자신의 기술을 훔쳤다고 확신했다. 기본 설계가 자신의 첨단 기술과 똑같았던 것이다. 이같은 의구심과 궁금증은 1년도 안돼 밝혀진다.

 

▲ 아폴로계획을 성사시킨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는 1963년 고다드의 로켓이 현대 로켓의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왜 우리에게 묻는가, 고다드에게 물어보라.”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독일과 소련 접경 피네뮌데(Peemunde)에서 미군과 함께 미국으로 이첩된 일단의 독일 과학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런 엉뚱한 말이 나왔다.

 

'페이퍼클립(Paper Clip)'이란 작전명으로 이들을 데려온 군정보당국자들의 놀라움은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이미 고다드박사의 성과를 알고 있었다.

 

알고보니 1942년 피네뮌데에서 개발돼 2년 후 런던을 쑥대밭으로 만든 독일의 V-2미사일로켓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고다드 로켓의 자매였다.

 

짓궂은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그의 연구에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나치 독일과 구 소련이었다. 나찌 독일의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는 고다드의 이론을 참조해 V-2로켓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고다드의 로켓 연구는 미국정부, 특히 그가 자신의 로켓 특허사용 및 채택을 건의한 육군의 주의를 끌었지만 육군이 거대로켓의 군사적 응용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지 못하면서 결국 반려된다.

 

반면 나찌는 1936년 주미 독일 대사관 무관 프리드리히 폰 보에트리셔를 고다드의 연구소가 있는 로즈웰로 보내 실험을 관찰토록 한 후 4페이지에 달하는 극비보고서를 받았다. 소련비밀정보국 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부(NKVD)역시 그의 실험에 주목했다. 1935년 미해군항공우주국에서 활약하던 소련 스파이는 고다드가 해군을 위해 2년전 제출한 보고서를 소련으로 빼돌린다.

 

▲ 지금껏 개발된 로켓중 가장 큰 추력을 자랑하는 새턴V로켓.
나찌의 V-2로켓 개발을 주도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아폴로 계획을 지휘한 브라운 박사는 1963년그의 로켓연구에 대한 선구적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고다드의 로켓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조악한 것일지는 몰라도 가장 현대적 로켓과 우주 운항체에서 사용되는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다드의 업적은  로켓이론의 선구자인 치올코프스키를 잇는 한편, 소련 로켓개발의 선구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발렌틴 글루쉬코의 연구와 수많은 후속 우주프로그램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다드는 이미 193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미소니언 편지에서 로켓추진비행체를 통해 찍은 달과 지구의 사진을 조각한 금속판메시지를 먼 문명에 보내는 것, 우주에서의 솔라에너지 사용 등에 대해 두루 생각을 펼친 선구자였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1957) 이후 미-소 간 우주개발경쟁이 가열되어 가던  1960년 8월. 미국정부는 고다드의 로켓특허에 대한 침해를 인정하고 고다드의 미망인과 구겐하임재단에 100만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출처]: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Posted by 경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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