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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ld/10-11 남극

세종기지 월동과 남극연구 활동의 목적



정호성 (15차 월동대장)

어둡고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와, 동토의 남극에도 시나브로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월동생활도 어느덧 10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보름만에 도착한 남극

지난 해 11월 30일 서울을 떠난 지 사흘만에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이제 남극에 들어가나 했던 기대는 기상악화와 수송편의 문제가 복합되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호텔 방에서 대기하기를 무려 엿새만에 경비행기를 이용해 그나마 대원 중 10명이 먼저 기지에 들어와 주요부분의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나머지 6명의 대원은 다시 엿새를 대기한 후에야 남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보름이 걸려서야 전 대원들이 기지에 모였으니 신고식을 호되게 한 셈이다.

어렵사리 도착한 만큼 그 느낌은 어느 해보다 애틋했다. 육지의 빙하가 바다로 흘러내리며 형성된 독특한 해안 빙벽, 눈과 얼음에 뒤덮인 하얀 세상, 간간이 드러난 암흑색 대지.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이뤄진 이곳에 세워진 선홍색 건물의 세종기지와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태극기. 고국을 떠나 지구 반대편 남쪽 끝에 도달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월동대원의 구성

월동대원 16명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라 할 수 있다.

발전기를 돌려 모든 에너지원을 얻으며(기관정비), 이로부터 얻어진 전기로 불을 켜고 난방을 하며(전기설비), 바닷물을 끌어올려 담수로 만들고 온수를 생산한다(기계설비). 설상차로 밤새 건물을 덮을 정도로 쌓인 눈을 치우고 스키두, 고무보트 등을 이용해 야외조사 활동을 벌인다(중장비). 1년간 보관하는 냉동식품을 위주로 어렵사리 한식을 만들어 제공하며(조리), 대원들이 다치거나 아프면 적절한 응급조치와 치료를 해야 하고(의무), 외부와의 교신은 생존과도 직결된 통로이다(전자통신). 이러한 시설 유지관리 업무와 생활 등의 업무는 총무를 통해 조율된다.

월동대 파견의 근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현장조사는 4-5명의 연구원들에 의해 수행되며, 연구업무를 포함하여 기지 대내외 업무를 총괄하는 기지대장이 있다. 기지대장의 경우 업무 성격상 보통 연구자가 담당한다.


남극의 주인은?

그렇다면, 우리 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남극에 상주기지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극대륙을 발견하고 미지의 대자연을 문명세계에 소개하던 19세기초의 탐험시대 이후, 세계 각국은 남극권의 영토와 이곳에 존재하는 자원을 차지할 명분을 구축하기 위해 각축을 벌여왔다. 남반구의 국가들은 경도와 인접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북반구의 영국, 노르웨이, 프랑스 등은 식민지령과 탐사 기여도를 주장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한편 미국, 러시아 등 영유권 주장을 유보한 세계 열강들은 남극에서의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남극을 관리할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57-1958년에 수행된 대규모의 국제공동연구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도(IGY: 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기간중 남극에 관한 많은 과학적 사실이 밝혀지게 됨에 따라, 1958년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 Scientific Committee on Antarctic Research)가 설립되어 국제협력과 정보교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59년 12월 미국의 주도로 좌충우돌하는 남극에서의 모든 문제를 공동 해결하기 위해 남극 진출국들간에 남극조약(Antarctic Treaty)을 맺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그간 각국에서 주장하던 영유권 문제는 유보되고 개발 또한 추후 논의키로 합의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남극조약은 가입국들만이 협의를 하고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배타적 정부간 협의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표결권은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P: Antarctic Treaty Consultative Party)들만이 갖고 있으며, 모든 사항이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지구환경변화와 남극

한편, 최근 들어 전지구적 환경변화와 그 여파가 인류의 생존이 걸린 최대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화석연료 사용 급증에 따라 형성된 온실효과(Greenhouse effect)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현상이 빚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 상승(Sea-level rise)을 우려하고 있다. 염화불화탄소(CFCs, 일명 프레온가스)의 과다사용에 따른 극지방 오존구멍(Ozone hole)의 형성으로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급증하여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갖가지 폐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지구적 환경변화는 인류의 현대화에 따른 자승자박이며, 이에 따라 빚어지는 제반 현상들이 극지방을 중심으로 시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 인류가 공동 해결해야 할 지구 환경변화의 감시와 예측을 위해 영유권 주장이나 자원개발과 같은 이기적 권리를 유보하고,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 Antarctic Treaty Consultative Meeting)와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를 중심으로 전 세계 극지 과학자들을 망라하는 네트웍을 구성하여 지구 환경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남극진출

1978년 남빙양 크릴 시험조업을 기점으로 시발된 우리 나라의 남극에 대한 관심은 1985년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의 남극관측탐험대 파견 이후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1986년 11월 세계 33번째로 남극조약에 서명국으로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988년 2월 남극 킹조지섬에 첫 상주 연구기지인 세종기지를 준공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우리 나라는 실질적인 연구결과를 국제사회에 제시함으로서 1989년 10월 배타적 심의결정권을 갖는 남극조약협의당사국(ATCP)으로 선임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와 더불어, 1990년 7월에는 남극연구과학위원회(SCAR)의 정회원국 자격을 획득하여, 남극 과학연구 및 자원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인 발언권을 인정받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남극 진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월동연구 활동

세종기지에서의 연구활동은 시기별로 크게 월동연구와 하계연구로 구분할 수 있다. 월동연구는 장기간의 환경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현장조사 업무가 주를 이루며, 기상·고층대기·지질 및 지구물리·생물 및 해양 분야로 구성된다. 반면, 하계연구는 바다와 육지의 얼음이 녹아 사라지고 날씨가 양호한 여름에 40-50명의 과학자들이 한두 달간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좀더 구체적인 세부 항목의 연구가 수행된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대체로 월동연구는 변화 양상 파악에, 하계연구는 원인 분석에 초점이 맞추어진다고 할 수 있다.

1년간 기지에 머물며 수행되는 월동연구는 비록 적은 인원이 감당하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의 연구 시료가 채집 또는 측정되고 있다. 연구원들은 자신의 연구 테마를 가지고 월동대에 지원하지만, 이외에도 유사 분야의 현장조사 업무가 별도 배당된다. 이렇게 남극 현지에서 획득된 시료들은 국내로 운반되어 분야별 참여 과학자들에게 분배되어 정밀분석을 통해 연구논문으로 발표된다.

최근 우리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종기지 주변의 대기온도는 지난 27년간 약 1℃ 상승하였으며, 앞바다의 해안 빙벽은 1956년이래 지속적으로 후퇴되어 2001년 4월에 이르러서는 폭 1.2 km인 마리안 소만(Marian 小灣)의 길이가 3 km에서 4 km로 확장되었다 (빙벽후퇴도 그림 보기). 또한 이러한 양상은 과거(6 m/년)에 비해 최근(81 m/년)에 이르러 급가속 되는 양상을 띄어, 이것이 과연 전지구 규모의 온난화 여파인지 아니면 지역적인 온난화 현상인지를 규명하기 위해 다각적인 연계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남극 성층권에 오존구멍이 형성되는 봄철(9-10월) 세종기지 상공의 오존량이 10년마다 약 14%씩 감소하며,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량은 반대로 약 23%씩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른 연안환경의 피해와 적응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연안 해수특성 분석과 함께 식물플랑크톤 생물량 조사가 매일 연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다양한 하계연구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 설명).


기지 생활

기지에서의 근무 또한 문명세계와 같은 리듬으로 돌아간다. 7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 아침회의를 갖는다.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은 국내와 동일하다. 저녁식사 이후엔 자유시간. 고립된 환경일수록 리듬을 타고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긴급을 요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야간 당직. 기지의 모든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발전기를 비롯한 주요시설과 통신/연구시설의 안전 점검을 매일 밤 2명의 야간당직자가 담당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돌아오는 당직근무는 신체의 리듬을 깨버리기 십상이다.

좁은 공간에서 늘 반복되는 일상생활은 대원들을 편협한 사고로 이끌기 쉽다. 그래서 때론 분위기 전환을 위한 놀이 방법을 찾기 위해 갖가지 궁리를 하게 된다. 눈이 많이 쌓이는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기도 하며 주말에는 주변의 산봉우리에 올라 갑갑한 마음을 털어 버리기도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족구, 배구 등 운동을 하기도 한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생일잔치를 핑계로 전체 회식 자리를 마련하여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대원들간의 화합을 이끌기도 한다. 지난 15년간 전통처럼 자리한 한 가지 행사는 생일자를 눈 속에 파묻는 것이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겉옷을 벗고 눈에 뒹구는 행위는 게걸스럽게 보일지 모르나, 스트레스 해소에는 최고의 충격요법이다.


기지간의 교류

남극 상주기지의 존립은 연구활동을 위한 베이스 캠프로써 뿐만 아니라 미래 자원개발시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기본요건이며, 지구 환경보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을 천명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세종기지가 자리한 킹조지섬에는 아르헨티나, 러시아, 칠레, 폴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중국, 한국 등 (연도순) 총 8개국의 상주기지가 있다. 이 가운데 본토에 근접한 남미의 네 나라는 모두 군인들에 의해 기지가 관리되고 있는 반면, 북반구의 네 나라는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기지가 운용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렇듯 제각기 자국의 기득권 확보를 근간으로 모여들었지만, 남극에서 함께 월동하는 각 기지 대원들간의 우정은 동질감으로 인해 사뭇 남다르다. 기지간의 연락은 무전기를 통해 이뤄진다. 안부와 함께 종종 무전을 주고받을 때에는 뭐라도 한 가지 도울 일을 찾아야만 만족할 지경이다.

최근 있었던 일이다. 올해말 우리 기지에 새로이 설치될 발전기의 바닥 기초공사를 위해 주변 기지에 모래가 있는지 물었다. 중국, 칠레, 러시아 기지들에서 서로 자기 것을 사용하라고 경쟁이 벌여졌고, 양질의 건축용 모래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 것을 사용키로 결정했다. 문제는 눈 속에 파묻힌 모래를 파내서 싣고 오는 것. 중국기지 해안은 바다가 얼어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인지라, 결국 러시아기지로 가 그들의 장갑차를 이용해 육상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고무보트를 타고 어렵사리 얼음으로 가득찬 바다를 건너 러시아기지에 도착하자 이미 그 친구들은 이미 중국기지에서 모래를 싣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하루 해가 짧은 이 계절에 안전하게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올해로 15년째를 맞는 우리의 월동생활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비록 후발주자로 뛰어든 남극연구이지만, 대외적으로 가장 체계적으로 기지가 관리되고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기에 대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12월초 인계인수를 마치고 우리가 귀국을 하더라도, 세종기지는 다시 새로운 대원들을 받아들여 여전히 굳건한 모습으로 유지되어 나갈 것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기쁨과 때묻지 않은 대자연과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다.

[출처]: 극지연구소